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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단, 쉬고] '일단, 쉼'이 준 선물
    • 작성일
    • 2018.10.26
  • '일단, 쉼'이 준 선물


    글 | 고은지(난민인권센터)

    매년 동료 활동가들이 떠났습니다. 소수자 인권운동과 조직이 처한 한계 때문입니다. 직장인이 늘 사직서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것처럼, 언제 활동을 그만둬야 할까를 생각하며 활동을 버티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활동이 좋기도 했지만, 대체로 활동이 절박했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렇지만 절박함만으로는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동료들을 잃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근 2~3년 동안은 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강구하여 활동가들의 소진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단체 내에서 폭력과 소진으로부터 활동가를 보호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개인·집단 상담과 활동가보호 워크샵을 시작하였습니다. 소진을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하나씩 짚어보니, 일상적인 쉼과 돌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우리는 변했습니다. 잘-쉼과 돌봄의 필요를 인정하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활동과 쉼의 균형을 잘 지키기 위해 야심찬 도전들을 시도했습니다. 계획했던 시도들이 현실에 바로 적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원이 부족했고, 활동은 파도처럼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인권재단 사람의 ‘일단, 쉬고’ 지원 사업은 ‘쉼’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지지가 되었습니다. 


    ▲ 일단, 쉼을 위해서는 활동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저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 여전히 인천공항에는 부당하게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강제송환이 되거나,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늘어놓았던 ‘쉬지 못하는 변명들’에 대답하듯 인권재단 사람은 제게 ‘일단, 쉼’의 기회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일단, 쉼’을 계획하며 잘 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동안의 삶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활동에 몰입했던 만큼, 좋아했던 음악, 좋아했던 감각, 좋아했던 계절과 버릇, 음식과 옷, 관계와 문장들에 무뎌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깊이 들어가는 활동들을 주로 했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채운 여행을 해보면 좋겠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계획의 단계에서부터 쉼이 몽글몽글 나오기 시작했지요!

     
    ▲ 이웃집 토토로 / 마녀배달부 키키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다시 떠올리다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하나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키워왔던 꿈이자 판타지 세계,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탈출구이자 쉼터였던 기억. 바로 지브리 세계입니다. 모두가 잠든 사이에 숲의 정령이 춤을 추면 도토리 싹이 나기 시작하고, 13살이 되면 마녀가 되기 위해 주양육자를 떠나 자립을 하는 세계이지요. 저는 TV를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지브리의 세계에 입문하였습니다. 아마 눈치를 채셨겠지만 저는 한 작품을 적어도 100회 이상 보았다고 자부할 만한 지브리 골수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히사이시조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히사이시 조는 지브리 작품에 음악감독을 하며 피아노나 오케스트라 지휘와 작곡을 겸하고 있습니다. 히사이시조의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히사이시조의 공연을 꼭 한번 가보는 것이 저에게는 인생에 중요한 과업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히사이시조가 지난 2008년 지브리 스튜디오 창립 25주년 기념 공연에 대규모 합창단과 관현악단 등 총 1,100명을 출연시키며 기념비적인 공연을 했고, 이후 은퇴의 시기를 고려하는 듯 전 세계를 순회하며 유사한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히사이시조가 여러 공연을 해왔지만, 25주년 기념 공연 이후 유사한 방식으로 지브리 OST만을 연주하며 세계를 순회하는 경우는 없었고, 또 나이가 일흔이 되어가니 아무래도 은퇴를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저는 더 이상 인생의 과업을 미룰 수 없어 ‘일단, 쉬고’를 통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Joe Hisaishi in Concert: Music from the Studio Ghibli films of Hayao Miyazaki에 다녀오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 산호세의 공원과 꽃

    이런 이유로 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산호세라는 도시를 다녀왔습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공원을 산책하며 명상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히사이시조의 공연을 즐기는 시간을 통해서 좋아하는 것들을 꽉꽉 채운 쉼의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산호세는 아름드리 나무가 마을 곳곳에 있는 장소였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명상을 통해 쉴틈 없던 일상에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명상은 획기적인 의식의 변화를 기대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술이라는 것을 쉼의 과정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름모를 풀과 꽃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만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 히사이시조에게 직접 감사의 편지를 전하고 왔습니다

    히사이시조의 공연은 약 2시간 가량으로 나우시카, 마녀배달부 키키, 원령공주, 바람이분다, 포뇨, 청공의성 라퓨타, 붉은돼지, 하울의 움직이는성, 센과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토토로의 OST들이 연속해서 연주되었고 실리콘벨리 지역에서 활동하는 Symphony Silicon Valley Choraile, Cantabile Youth Singers, Reedley High School Symphonic Band가 함께하였습니다. 2시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음악을 듣는 내내 여러 감정과 생각이 교차하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히사이시조의 음악을 들어왔던 만큼 그동안의 인생의 여정을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인생에 중요한 기억이 있듯이, 저에게도 잊고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 잊지 않아야할 중요한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전시된 LGBT운동의 역사

    미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2015년 미 대법원의 동성결혼 합헌 판결기념 LGBT운동의 역사를 정리한 작품을 보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혼인평등권을 포함한 성소수자의 여러 권리를 위해 싸워온 발자취 정리한 작품을 보며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어서 혼인평권을 쟁취하고 활동의 역사를 기록할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고, 한국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오랜 싸움의 과정에서 활동가 한 명, 한 명이 적절히 쉼을 보장받고, 소진되지 않으며, 행복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긴 싸움의 여정에서 인권활동가들의 곁이 되어주고 있는 인권재단 사람이 있어 다행이고, 또 감사합니다. 


    <일단, 쉬고>는 쉼과 재충전을 위해 활동가 스스로 기획한 여행, 취미활동 등 인권활동가 개인 프로젝트를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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